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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간 쌓여온 서양음악의 방대한 건반 레퍼토리를 다뤄야 하는 오늘날의 피아노전공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반드시 해보았을 것이다. 하프시코드를 위해 작곡된 바흐의 평균율을 오늘날의 피아노로 연주하기 위해 어떤 아티큘레이션을 사용해야 할까? 18세기로 직접 돌아가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접한다면 어떤 음색의 연주를 듣게 될까?
‘역사주의 연주’란 작품이 창작된 당시 사용되던 악기와 연주 방식을 추적하여 작곡가의 의도에 최대한 가까워지도록 연주하는 방식을 뜻한다. 청각적 자료가 없던 시대를 다루는 만큼 많은 연주자들의 연구와 시행착오가 필요한 분야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는 2019년 2학기부터 ‘건반악기의 역사주의 연주 실제’ 수업을 개설하여 진행하고 있다. 이 수업은 포르테피아노와 하프시코드, 그리고 모던 피아노에 이르는 여러 시대의 건반악기를 다룰 뿐 아니라 피아니스트인 박종화 교수와 하프시코디스트 오주희가 함께 진행하여 보다 심도 있고 다양한 시각으로 고(古)음악에 접근한다.
박종화 교수와 하프시코디스트 오주희, 그리고 이 수업에 참여했던 강성윤, 김정휘, 이린다, 정상욱 네 명의 학생들과 함께 한 인터뷰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시대악기 연주, 특히 포르테피아노에 관한 수업은 서울대학교에서 처음 시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수업을 개설하신 계기가 무엇인가요?
박종화 교수: 오늘날 음악은 산업적으로 세분화된 경향이 있습니다. 서양음악 안에서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클래식”은 사실 18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음악에 속하고, 이는 서양음악의 거대한 작품집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 “클래식”의 양 끝에는 각각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를 포함하는 고음악과 오늘날 작곡가들이 활발하게 작품을 더해가고 있는 현대 음악이 있습니다. 현재 “클래식”에 관한 국내의 교육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더 큰 도약을 위해서는 서양음악 양끝 시대의 작품에 대한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 양끝 시대가 상징하는 ‘전통’ 과 ‘혁신’으로 무장한 창의적인 음악인재들을 배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과 혁신을 바라볼 때, 혁신은 학생들에게 비교적 쉽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20세기에 발달된 많은 미디어 기술의 혜택에 힘입어 신세대들이 혁신의 선두를 달리기 때문에 공감이 쉽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지요. 현대 음악은 이런 관점에서 접근성이 좋습니다. 이에 비해 고음악은 현시대와 상반된 가치관과 환경, 그리고 그 시대의 시대정신(zeitgeist)과 스타일에 대한 이해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접근에 이질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고시대의 경우 대부분의 기록이 문서로 되어있고 이 문서 또한 해석이 필요하기에 학생들의 이해를 도모하는 큐레이팅이 필수적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고음악 큐레이팅을 당대의 연주관습적 관점에서 제공하고자 이 수업을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하프시코디스트 오주희: 역사주의 연주에 대한 관심은 20세기가 시작되기 직전 영국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그 역사가 이미 한 세기를 넘어섰어요. 그리고 이에 대한 관심은 계속 증가되어 현재에는 놀라울 만한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종래의 낭만주의적 해석을 거부하고 옛 음향으로 작품의 본 모습을 살려내자는 당대연주가 보편적 양식으로 자리 잡아 르네상스, 바로크 음악에 관한 한 현대적 연주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요구와 교육의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해 서울대학교가 국내 최초로 소장한 콘라드 그라프 포르테피아노를 활용하여 수업을 개설하게 되었어요. 이 ‘건반악기의 역사주의 연주 실제’ 수업에서는 르네상스부터 고전 시대까지의 건반악기에 관한 역사적 배경과 당시에 통용되던 연주 관습, 즉 리듬, 아티큘레이션, 템포, 장식음, 즉흥연주 등에 관한 내용을 이론 뿐 아니라 실습을 통해서 실제 연주에 적용할 수 있도록 심도 있고 구체적으로 다루게 됩니다. 학생들이 바흐의 음악을 하프시코드로, 그리고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소나타를 작곡 당시의 오리지날 악기로 연주한다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과 새로운 시도를 넘어 작곡가의 의도를 간파하여 악보에 숨겨진 수많은 정보를 터득하고, 이를 실제 연주에 반영하여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첫 걸음이라 생각합니다.
이 수업에서는 하프시코드에서부터 여러 종류의 포르테피아노, 그리고 모던 피아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악기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박종화 교수: 학생들은 현재 이 수업을 통해 클라비코드, 하프시코드, 슈타인, 그라프를 다뤄볼 수 있고,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발터까지도 다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악기의 발전이 수많은 작곡가들의 불만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이나믹의 변화가 더욱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음량이 더욱 커졌으면 좋겠다’ 또는 ‘더 풍부한 표현이 가능했으면 좋겠다’와 같은 것들이지요. 우리는 다양한 건반악기를 통해서 당시 작곡가들이 갖고 있던 일종의 제약을 경험하고, 이것이 어떤 작곡 및 연주방식으로 극복되고 또 어떤 도전을 필요로 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악기는 작곡가와 연주자 간의 소통을 위한 가장 완벽한 매개체가 될 수 있는 거죠. 연주자들은 각 악기 별 특성을 실제로 접하면서 그 당시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또 당시 악기의 섬세한 부분들을 모던 피아노에선 어떻게 재현할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볼 수 있습니다. 건반악기의 역사에서 포르테피아노의 시대를 하프시코드에서 모던 피아노로 발전하는 과정에 위치한 일종의 ‘과도기’라고 본다면, 하프시코드 주자와 피아니스트의 통찰력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학생들에게는 흥미롭고 유익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요?
하프시코디스트 오주희: 먼저 하프시코드를 보면 이 악기는 16~18세기에 가장 인기 있는 건반악기였고, 독주에서 합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널리 사용되었어요. 하프시코드와 달리 강약조절이 가능한 포르테피아노는 18세기부터 이후 300년 동안 끊임없이 진화해 오늘날의 피아노에 이르게 되었죠. 안드레아스 슈타인(Johann Andreas Stein)이 고안해 콘라드 그라프로 계승된 빈 식(Viennese Action) 피아노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빈에서 작곡할 당시의 악기로, 1770년대부터 1830년대까지 유럽에서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섬세한 음향을 지닌 빈 식 피아노는 보다 극적인 표현을 요구하는 낭만주의 작곡가들과 피아니스트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보다 큰 음량과 풍부한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머의 무게는 점점 증가했고, 섬세한 음향이 장점이었던 빈 식 피아노는 외면당하게 되었죠. 모던 피아노의 특성은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새로운 미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긴 레가토로 이어진 노래와 같은 음악이 점차 인기를 얻게 된 역사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어요. 바흐의 건반음악에는 하프시코드가 완벽한 악기이듯이 각 시대별로 작곡가들은 그 악기에 걸맞는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따라서 모차르트, 하이든의 음악이 가진 섬세한 뉘앙스는 현대의 슈타인웨이 피아노보다는 초기 포르테피아노로 연주할 때 보다 잘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전 시대 피아노 작품들이 오늘날 빈 식 악기의 이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모던 피아노로 더 많이 연주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집니다.
그럼 학생들에게 질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던 피아노가 아닌 다른 건반악기들을 연주하면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김정휘: 두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모던 피아노만 주로 다뤄왔기 때문에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스타일을 상상으로만 접근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실제로 시대악기를 연주해보니 제가 그동안 상상한 것과 다른 부분이 많았고, 제가 상상했던 것들의 수준 또한 만족스럽지 못했어요. 덕분에 그 음악이 작곡된 시대의 음향에 대한 아이디어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정말 값진 경험을 했습니다.
시대악기와 모던 피아노는 어떻게 달랐나요?
이린다: 처음 포르테피아노를 접했을 때는 악상의 조절이 되고 페달이 있다는 점에서 피아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피아노를 치듯이 연주하니 레가토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소리도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페달의 사용도 예상한 것과 너무 달랐구요. 그때부터 악기를 연주할 때 저에게 익숙한 손의 움직임과 페달 사용 등에서 벗어나 귀를 더욱 사용하게 된 것 같아요. 무언가를 표현함에 있어서 어느 선을 넘어가면 이 악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하게 악기를 다뤄야만 했던 색다른 경험이 되었어요. 덕분에 같은 곡이라도 어떤 악기를 통해 표현되는가에 따라 보여질 수 있는 다양한 매력들을 느낄 수 있어서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역사주의 연주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강성윤: 저는 작곡전공이라 피아노전공만큼 건반악기를 많이 다루진 못했지만, 하프시코드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 좋아했어요. 제가 생각한 당대 악기들의 큰 매력 중 하나는 음색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문헌이에요. 고전주의 이전 시대의 문헌이 생각한 이상으로 다양했거든요. 이 수업을 통해서 제가 몰랐던 작곡가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작곡한 수많은 작품들도 접할 수 있었어요. 작곡가와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더욱 빠지게 되었죠. 또한 역사주의 연주는 저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주어서 저의 작곡 경향과 음악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분야임엔 틀림없는 것 같아요.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역사주의 연주의 필요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정상욱: 제가 처음 시대악기를 접했을 때 ‘그 시대에는 이런 소리가 났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치 시간여행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음악에서의 ‘스타일’이란 것은 쉽게 보이지 않고 들음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인데, 말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아요. 하지만 이런 것들이 음악에선 큰 매력으로 다가오죠. 가장 확실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악보이고, 악보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어요. 하지만 그 음악의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죠. 이러한 단서에 대해 고민하고 본인만의 지향점을 찾아 나아가는 것은 음악을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의 꿈이 아닐까 해요. 따라서 이런 역사주의 연주를 공부하는 것은 객관적인 근거에 의해서 우리가 체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작품을 해석하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학생들은 시대악기를 배우고 직접 연주하며 그들의 음악적 가치관과 경험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학생과 교수 간에 이루어진 원활한 피드백은 더욱 시너지를 일으켰을 것이다. 비록 코로나19로 인해 마스터클래스와 같은 참여수업에 제약을 받았지만, 새로운 학기에는 비대면과 대면 수업을 적절히 활용한 탄력적인 수업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20년도 2학기에 촬영된 학생들의 연주 영상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 될 예정이므로 시대연주에 관심있는 학생들은 참고하여도 좋을 것이다.
글_ 조대인 음악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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