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현재의 소리] 좌절하지 않는 법: 성악과 박미혜 교수 “지속 가능한 음악의 길”
    SNUMUSIC 2024.08.27 14:02

2021-09-21 20: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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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러시아의 한 호텔방. 볼쇼이 극장에 올라갈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역을 위해 연습하던 소프라노 박미혜는 한 만남에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방을 정리해 주던 호텔 직원이 오페라에 대해 가진 사랑과 열정에 관해 듣고는, 러시아 일반 대중과 음악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그에 비하면 당대의 한국은 얼마나 경직되어 있는지, 그 문화적 차이를 실감했던 것이다. 박미혜 교수가 <서울대 음대 레슨 노트>에서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중 <이상해! 아, 그 사람인가>를 다루며 들려준 이야기다.

현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교수로 재직 중인 박미혜 교수는 예원학교, 서울예고, 서울대 음악대학에서 수학하고 미국 줄리어드 음악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내셔널 콩쿠르를 비롯한 세계 유수 콩쿠르에서 우승했으며, 뉴욕 시티 오페라단,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플로렌틴 오페라 컴퍼니 등과 협연하며 다수의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다. 오랜 시간 교수직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고, 최근에는 <서울대 음대 레슨 노트>의 벨리니, 베르디 레슨을 통해 그 모습을 대중에 공개하기도 했다. 여러 성악가들로 구성된 ‘앙상블태리’의 대표 및 예술감독 또한 맡고 있다. 『울림』 이번호에서는 그런 박미혜 교수를 만나 교육과 성공, 음악과 일상의 균형에 대해 들어 보았다.

 

Q. 교육자로서의 원칙, 혹은 레슨 시에 특히 염두에 두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 음악적 능력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해내는 역량이다. 때문에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우선, 주어진 문헌에 충실하게 작업하면서도 이면에 숨겨진 작곡가의 의도를 자기답게 해석해낼 수 있는 ‘의역 능력’을 키워주려 한다. 한편으로는 학생들 각자의 강점과 아이덴티티를 찾아내어 자신감과 표현력을 갖게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저마다의 영역에서 대단한 칭찬을 들으며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들도, 대학에 와서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친구들을 만나 방황하는 경우가 있다. 음악의 길은 자신에 대한 신뢰와 사랑,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마라톤의 길이다.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한 사람의 성인’으로 대우하여 책임감 또한 심어주어야 한다.

 

Q. 교육자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 모교인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내게는 축복이다. 무모하게 좌충우돌하고 때로는 절망도 하던 대학 초년생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 서서히 변화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즐거움이 있다. 연주가, 선생, 엄마로 성장한 학생들이 “선생님을 만나 행복했다”거나 “지금까지 음악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해 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언제든 돌아와 격의 없이 음악에 대해 수다를 떨 수 있는 그런 멘토로 여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Q. 서울대 음대의 교육환경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에 비해 관악캠퍼스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음악대학의 환경은 40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외국 대학은 물론이고 국내의 다른 대학과 비교해도 서울대 음대의 교육환경은 너무나 열악하다. 다만 그런 상황에서도 교수진과 학생들의 수준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더 나은 토양을 제공한다면 분명 최고 수준의 대학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Q. 서울대 음대의 발전방향, 혹은 이상적인 음악대학상(像)을 제시한다면?

: 우선 시설상의 개선이 필요하다. 도서관, 연습실, 강의실, 연주홀, 복지시설 등이 제대로 제공되고 보완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자발적인 연주활동과 워크숍 들을 학교에서 잘 지원, 지도해 주어야 한다. 활발한 실내악, 오페라 발표가 다양한 학생 앙상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한국 학생들의 수동적인 교육자세가 적극적으로 바뀐다면, 졸업 후 음악계에 발을 디뎌서도 긍정적인 변화들을 불러오리라 믿는다.

 

Q. 서울대 재학시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궁금하다.

: 이경숙 선생님과의 감동적인 레슨시간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번은 벨리니 《청교도》 중 <광란의 아리아>를 준비해 갔다. 무척 엄격하고 무서운 선생님이시라 긴장해서 노래하고 있는데, 얼굴에 밝은 미소를 띄우시곤 ”아주 잘 준비해 왔구나, 그런데 여기는 이렇게 해 보렴!” 하시더라. 그러더니 엘비라(Elvira)가 거의 미쳐서 울고 웃는 장면을, 직접 춤까지 추시며 노래해 보여주셨다. 소름 끼치도록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Q. 피아노를 통해 음악과의 첫만남을 가졌던 것으로 안다. 성악 공부가 힘들 때마다 위안을 찾기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고, 그렇게 계속해서 음악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었다고 했는데. 현재 서울대 음대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특별히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는지.

: 모든 사람이 세계 최고의 성악가가 되어 세계무대에 설 수는 없다. 대학을 다니면서는 그런 ‘성공의 이미지’에 집착하기보다 각자가 살아가는 이유,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씩 찾아 나가야 한다. 좌절할 것만 같을 땐 잠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거나 어딘가로 떠나보는 것도 좋다. 침잠과 도약과 멈춤을 반복하며 내 미션과 비전을 파악하는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성공이라는 키워드에 사로잡혀서 치열한 경쟁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들에게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의 나’도 분명한 성공이라는 생각을 심어주려 애쓰고 있다. 작은 실천과 작은 노력으로 실현 가능한 목표부터 이뤄 나갔으면 한다.

 


글_김해준(작곡과 이론전공)